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상황속에서 낙담하지 말고 꿈을 가지세요

존하버드는 영국 출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뒤 목사로 봉직하였다. 존 하버드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을 앓게 되어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400권의 장서와 780파운드의 재산을 기부하게 되어 1639년 하버드의 이름을 따서 하버드라는 대학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전에는 하버드대가 아니라 New College 또는 The College at New Town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젊은 청교도 목사 가운데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1637년에 미국 신대륙의 꿈을 안고 미국 땅에 찾아 왔다. “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펼치면서 한번 살아 보자.”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그는 미국 땅에 찾아 왔다. 그런데 불과 1년이 지나지 못한 1638년에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결핵은 아주 심각한 병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자신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기의 전 재산과 소장하고 있는 도서 400권을 어떻게 할까 기도하다가 자기 도시에 새롭게 시작된 뉴타운 칼리지라는 대학이 있었는데 그 대학에 전 재산과 도서 400권을 기증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기증서에 한 장의 편지를 더 첨부했다. 그것은 일종의 이 사람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신앙 고백서라고도 할 수가 있다. 기도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 땅에 꿈을 안고 찾아 왔습니다. 나는 좀 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고, 좀 더 법률도 공부하고 싶었고 또 과학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훌륭한 신학자, 훌륭한 법률가, 훌륭한 과학자는 나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꿈 이것을 나의 후학들을 통해서, 후배들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을 기대합니다. 내가 학교에 제공하는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훌륭한 신학자, 훌륭한 법학자, 훌륭한 과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길러져 이 땅을 풍성하게 하고 인류에 기여하는 위대한 거인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합니다.”
감동적인 이 헌정서를 받은 이 학교의 이사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 분들은 이제 이 젊은 목사 존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성을 따서 학교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이 사람의 전체 이름이 뭐냐하면 존 하버드였다. 이 학교는 뉴타운 칼리지에서 하버드 대학으로 변경 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이 대학을 통해서 분명히 열매를 맺게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하버드대학이 이렇게 출발하게 되었다. 이 젊은이의 꿈, 이 젊은이의 기도 속에서 위대한 미국, 위대한 하버드의 꿈 이 자라가게 된 것이다.
비전을 가진 사람, 꿈을 가진 사람들. 시대가 어두울수록, 시대가 고통스러울수록 이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야곱 형제국가 에돔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가 조상이스라엘과 혈연
 
야곱의 형제 ( 이스라엘의 형제 )
 
성서의 에돔 땅은 사해 남쪽 지역으로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국가의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압과는 세렛 시내를 경계로 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경계는 홍해에 맞닿아 있는 에시온게벨(현재 에일랏)까지였다. 에돔의 수도는 보스라로(34:1, 48:24) 이곳에는 에돔의 궁궐이 있었다(1:12). 히브리어로 에돔의 의미는 붉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와디 알-아르바 동쪽의 세일산의 색깔이 붉은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성서에 의하면 에돔 땅의 조상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로 그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붉었다(25:25).
 
또한 그는 야곱이 내어 준 붉은 것을 먹어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다(25:30). 결국 그가 살았던 지역은 에돔이라 불렸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세일 산 에돔 들에 거주했다(32:3; 36:89). 창세기 36장은 세일 산에서 살았던 에돔 족속의 족보를 상당히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36:943). 이는 아마도 에서가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관계는 에돔 족속이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에 조금 더 우호적이도록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데스에서부터 에돔 땅을 건너가고자 할 때 에돔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20:1421). 그러나 에돔은 모압과 암몬이 그랬던 것처럼 연맹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하지는 않았다. 성서는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의 형제이기에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23:7).
 
사막 유목민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하던 시대에 에돔은 이미 왕정을 이루고 있었다(20:14). 그러나 역사고고학적으로 볼 때 당시 에돔은 국가 개념의 왕정이 아닌 유목민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대보다 100년 정도 빠른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256번에 기록된 우루--(URUU-du-mu·두무 도시라는 뜻)가 에돔 도시국가를 말한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었던 우두무라 불리던 유적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시대와 동시대에 기록된 아나스타시파피루스(주전 12131203년에 재위한 메르넵타 왕 시대에 기록됨)에돔으로부터 온 샤수 유목민을 언급하고 있다. 샤수는 주전 15세기께부터 이집트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 발로 걸어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샤수를 사막 유목민으로 보고 있다. 샤수는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사해 남쪽 지역을 넘어 시나이 반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들로 당시 국가보다는 족속(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왕보다는 족장의 개념이 더 어울린다. 때로 이들은 이집트의 북서쪽 지역을 넘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아멘호테프세 같은 경우 그의 적들의 목록에 샤수를 넣기도 했고 세티I세와 람세스세의 벽부조에는 샤수와의 전투 현장 모습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했던 아나스타시파피루스 외에 샤수를 에돔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에돔 땅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고고학적 흔적이 주전 9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에돔을 사막 유목민의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다
 
사울은 왕이 되자 우선 그의 주변에 있던 이스라엘의 적을 정복해야만 했다. 이 중에는 에돔도 포함되었고 성서에 의하면 에돔을 비롯한 모든 적은 사울에게 정복되었다. 사울은 에돔 사람들을 관직에 앉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목자장 도엑은 에돔 사람이었다(삼상 21:7). 도엑은 놉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을 왕에게 고했던 인물이다. 사울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다윗시대에도 여전히 적군이었다. 다윗은 소금 골짜기 즉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물리쳤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어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게 하였다(삼하 8:1314). 심지어 그는 요압을 시켜 6개월 동안 남아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이도록 하였다(왕상 11:1516). 덕분에 솔로몬은 평화롭게 얻은 에돔 땅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어(왕상 9:26) 오빌에서 금을 가져올 수 있었고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비록 요압의 칼에서 살아남아 이집트에서 돌아온 하닷에 의해 에돔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잠시 벗어난 듯하나(왕상 11:1425) 여호사밧 때에 에돔에는 왕 대신 섭정 왕이 있었고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고자했던 모습은 에돔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리광산-키르벳 엔-나하스
 
이렇듯 성서는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기 즉 주전 11세기 후반부터 에돔과의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에돔이 주전 86세기께 존재했던 나라였고 이스라엘의 속국이기보다는 독립국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시행된 캘리포니아 대학과 요르단 유물청의 키르벳 엔-나하스에서의 발굴은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키르벳 엔-나하스는 사해 남쪽에 위치한 유적지로 공중에서 찍은 사진에도 확연히 보이는 것처럼 사각형 모양의 요새화된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대부분이 주전 109세기께 유물로 측정되고 있으며 주전 11세기께 이집트 인장들도 발견된 바 있다. 유적지 공중사진에서도 검은 흔적들이 목격되는데 이는 구리를 녹일 때 생기는 물질들이 굳어서 발견되는 구리 용재(鎔滓)의 흔적들로 이곳이 구리 광산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이스라엘의 주전 109세기 유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벳 엔-나하스는 솔로몬의 이스라엘 경계에 세운 요새들 선상에는 속해 있지 않은 즉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유적지가 아니다.
 
결국 유적지를 발굴한 토머스 레비(Thomas Levy) 교수는 이 유적지는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에돔을 정복하고 세운 구리 광산을 위 한 요새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이곳을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네게브지역에 있는 팀나 유적지를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사실 이 유적지는 이집트의 구리 광산으로 주전 14001250년께 활발한 활동이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오히려 미미한 흔적이 있을 뿐이며 구리광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요새화되어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성서에는 솔로몬이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요새화했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역대상 223절에 예루살렘의 다윗성을 짓기 위해 철과 놋이 준비되었던 것을 보아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56t의 구리 보유량을 가진 10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이 발견된 키르벳 엔-나하스가 아마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겨자씨

최효선의 글 ‘방귀 감사’가 있습니다. “수술 후 하루가 지났다. 점심 무렵 밥 아주머님이 ‘방귀 나오셨어요’ 묻는다. ‘아니요’ 했더니 ‘방귀 나오면 알려 주세요. 죽 드릴게.’ 회진 오신 선생님이 방귀 나왔어요 묻는다. 아니요. 운동 많이 하세요… 아내가 병실로 돌아와서 대뜸 방귀 나왔어요 묻는다.

그 놈의 방귀, 전에는 방귀 많이 뀐다고 핀잔하던 아내가 내 방귀를 애타게 기다린다.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 후에 장로님 방귀 나왔어요. 아니요, 아직. 병실에 들어서시는 분마다 방귀 타령이다.”

며칠 전 새벽시간에 어느 권사님의 감사헌금에 “하나님, 우리 며느리 방귀 나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새벽 예배당 안은 성도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수술한 사람이 방귀가 나오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방귀가 나오면 “아, 이제 살았다”고 기뻐하는 것이다.

누구나 허구한 날 방귀를 뀌지만 그것이 중요한지 모르며 살아간다. 내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사거리가 된다. 자녀들이 건강한 것, 남편이 출근하는 것, 군대 간 아들이 제대해 돌아오는 것이 감사요, 계절의 변화 가운데 푸른 하늘 뭉게구름에 억새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제주에 산다는 것이 감사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메데 - 바사 제국

성경에 보면 메대라는 말이 나온다. 6:2절에 보면 메대도 악메다 궁세서 한 두루마리를 얻으니 ~”
다리오왕이 조서를 내려 조사를 하게 되는데, 메대인 악메다 궁에서 한 두루마리를 발견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명령을 내린다. 메대는 메디아이고, 그 수도는 에파타나 ( = 악메다 )이다.
9:1절에 보면 메데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 ( 바사제국의 왕이다 )과는 다른 인물이다.
역사가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책에 보면 단 9:1 절의 아하수에로 왕은 메대의 마지막왕이다. 세계사 기록에 그를 아스티아게스 라고 부르고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 라고 이름한다. 이 왕은 누구와 결혼을 했나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데교회, 사데의 원래 지명은 사르디스 이다. 리디아 나라의 수도가 사르디스 이다.
리디아는 고대제국 중에서 큰 나라였다. 이곳은 그리스 신화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의 나라이다. 성경에서 그의 선조는 셈의 아들인 룻의 후손이다. ( 10:10)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님 ‘ 로도스섬의 크로이소스 상 의 주역인 크로이소스의 공주가 리디아의 마지막 왕인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의 왕후로 맞이하며 연합동맹을 맺게 됨으로 사르디스와 메데 나라는 동맹국가를 맺게 된다.
아스티아게스 와 사르디스 공주와의 결혼으로 자녀 다리오, 만다네를 낳았다. 공주 나이 17 때에 아스티아게스 왕이 꿈을 꾸는데 ① 만다네 공주가 오줌을 싸는데 온 아시아 잠기는 해괴망측한 꿈을 꾸었다. 꿈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아스티아게스 왕은 다니엘 시대처럼 술사, 박사들을 불러 꿈을 해석하라 했고, 만다네 공주의 몸에서 온 천하를 다스릴 위대한 인물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아하수에로 왕은 세계를 다스릴 자가 자신에게서 난 자가 다스려야지 어떻게 공주의 몸에서 나온 사람이 다스니랴 ! 이렇게 왕은 흑심을 품고 공주를 먼 곳인 엘람수산성이라 하는 지방 장관 칸비세스 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 버린다.
② 엘람으로 시집 보낸 후 다시 꿈을 꾸게 되는데 공주 아랫배에서 포도넝쿨이 힘차게 뻗어 나오더니 가지가 뻗고 잎이 피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날리더니 삽시간에 온 아시아가 그 포도넝쿨에 다 덮여 버리는 그런 꿈을 꾸었다. 또 한번 박사와 술사들을 불러 모으니 지난번과 같이 공주의 몸에서 이미 온 천하를 지배할 만한 인물이 잉태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꿈에 흑심을 품은 아하수에로 왕은 총리 하르파고스를 불러 비밀 지령을 내린다. 공주가 엘람 지방에서 애기를 낳자 못하게 하고 잘 관리하고 있다고 에파타나로 와서 출산을 하되 산파를 시켜 애기를 사산 시키어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린다.



하르파고스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대로 만다네 공주를 에파타나로 올라오게 한다. 하지만 산파는 애기를 받았을 때에 그 첫울음이 터지기 전에 그대로 숨통을 막아서 아기를 빼돌려 사산 된 것처럼 하려 했으나 아이가 울음을 떠뜨린다. 이 때 총리의 신하의 아내는 오랫동안 아기를 낳으려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야 잉태해서 아기를 낳는데 아기가 사산 되어 버리는데....

욥바 :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갈때 배 탔던 유구한 역사 항구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베니게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이스라엘의 지중해변이 아닌 베니게의 지중해변에 위치한 

항구도시였던 시돈과 두로를 탐방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지중해변에는 항구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

. 구약의 욥바와 신약의 가이사랴가 좋은 예이다.

욥바는 현재 텔아비브의 지중해 해안 남쪽지역을 말하는데 높은 절벽 위에 위치해 있으며 이 절벽 바로 아래에 항

구가 있다. 욥바는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이는 도시의 이름을 왜 히브리어

(아름다움이라는 뜻)’에서 가져왔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욥바는 항만의 조건이 좋지 않은 이스라엘

의 지중해변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항구도시였다. 시돈과 두로에서 벌목한 백향목은 욥바를 통해 육지로 들어왔고

(대하 2:16; 37),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를 욥바에서 탔다(1:2). 베드로가 머물렀던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이 살던 장소이기도 하다(10:32). 욥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며 오늘날까지도 인구가 

밀집한 도시이다 보니 고고학적인 흔적들이 사라져 버렸다.

욥바에는 주전 18세기 도시 성벽의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도시의 모습을 복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전 

16세기에는 돌로 기초공사를 하고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는 오랜 시간 서 있지 못했고 이

집트의 흔적으로 뒤덮인 것으로 보아 이집트가 도시를 점령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주

1440년쯤 투트모세 세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나섰다. 그는 군장관 제후티(Djehuty)를 시켜 욥바의 통치자에

200개의 거대한 바구니에 조공을 담아 바쳐 마치 이집트가 항복한 것처럼 보였다. 욥바의 사람들은 이를 축하

했고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베풀었다. 그들이 취했을 때 조공품 사이에 숨어 있던 이집트의 군사들이 나와 욥바를 함

락시켰고 투트모세 세의 카르낙 신전 벽에 자신의 승리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욥바는 이집트의 통치 아래 있

었다. 람세스 (주전 12791213)는 욥바에 자신을 위한 화려한 궁전을 지었는데 그 궁전은 이미 1950년대 

캐플란(Y Kaplan)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발굴에 대한 출판물이 충분치 않아 결과물을 찾아보기

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발굴에서는 이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발견되었는데 사암으로 만들어진 문의 

기둥에는 상형문자로 람세스 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최근 마인즈대학과 로스앤젤레스대학, 그리고 이스라엘 유물청이 함께 진행하고 있는 욥바 문화유산 프로젝트

(The Jaffa Cultural Heritage Project)1950년대의 발굴 결과를 조사, 정리하여 출판하고, 보다 확장된 발굴 작

업을 욥바에서 하고 있다. 이 발굴을 통하여 주전 2000년쯤 진흙을 빚어 만든 벽돌로 쌓아 올린 성문이 화재에 타 

버린 모습이 발견되었고 이는 이집트의 정복 결과로서 투트모세 세가 그의 벽부조에 진실을 말하고 있음이 증

명되었다. 또한 이집트 왕 아멘호텝 세의 인장과 이집트 전통의 토기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이집트의 통치 역사

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욥바를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지파는 욥바 맞은편’(수 

19:46)을 경계로 배정 받았을 뿐 욥바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나마도 단 지파는 지중해안 지역을 정복하지 못한 

채 북쪽의 라이스 땅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욥바는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 될 수 없었다(1718). 이 시대에 

욥바에서는 블레셋의 토기와 흔적이 보인다. 이 장소가 가나안 출신이 아닌 에게 혹은 갑돌(크레타섬) 출신이었

던  블레셋의 차지였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다. 욥바 항구 입구에는 10m 높이의 검은 바위

가 수면위로 솟아있는데 그리스 신화에는 안드로메다라는 욥바의 공주가 바다 괴물에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이 

바위에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페스세우스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와서 괴물을 죽이고 그녀를 구출했다는 전설이 

있다. 블레셋의 신전은 비록 바닥만 남아있기는 하지만 두 개의 기둥으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었던 상당히 큰 규모

였으며 신전 바닥에서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 해골이 발견되어 사자 신전이라고도 부른다.

한때 블레셋의 도시였던 욥바는 솔로몬이 베니게의 백향목을 요바로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도시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에 의하면 솔로몬이 사용한 항구는 현재 욥바가 있는 곳이 아니라 북쪽으로 5

어진 작은 항구 텔 카실레(Tel Qasile)였을 확률이 더 높다. 더불어 산헤립의 기록에 의하면 히스기야 시대에도 욥

바는 아스글론 영지였다. 결국 히스기야를 위협했던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가나안 땅의 46개의 도시를 휩쓸고 지

나갔을 때 욥바도 함께 파괴되었다(주전 701). 앗수르가 멸망하면서 욥바는 바빌론의 손에 넘어갔다. 알렉산더

가 가나안 땅을 점령했을 때 욥바는 시돈과 두로와 함께 헬라 도시가 되기도 했다(주전 332).

헬라의 통치가 붕괴되자 욥바는 잠시 유대인들의 거주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욥바가 유일한 항구였다는 사

실은 이곳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상상하게 한다. 헬라의 프톨레미 I세 소테르(Ptolemy I Soter, 주전 

367283)는 욥바에 수비병을 주둔시켰다. 그 이후 헬라에 대항했던 마카비(Maccabaeus)라 불리는 제사장 출

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욥바의 유대인 200명이 익사 당했다(주전 167). 마카비는 항구를 불태

우고 마침내 욥바를 점령하였다(마카비 110:75, 12:33, 13:11). 바로 이때 처음으로 유대 혹은 이스라엘 사람들

은 욥바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마카비 가족과 저항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하스모니안 왕조(The Hasmonean 

dynasty)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주전 14263). 하스모니안 왕조의 통치자 중 하나인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가 해양활동의 상징인 닻을 그의 화폐에 주조할 수 있었던 것은 욥바를 통해 바다로 진

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전 63년 폼페이의 이스라엘 점령은 욥바를 이방인의 손에 다시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되었

을 때(The Great King Herod, 주전 37) 그는 욥바를 통해 로마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의 

거주지로서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욥바를 로마화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헤롯은 욥바가 아닌 새로운 항

구도시를 가이사랴에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주전 30년쯤). 욥바는 유대인들의 작은 항구로 오랜 기간 남아 있었

고 1세기 이후 기독교 도시로 성장했다. 비잔틴 시대에 욥바를 방문한 이들은 욥바가 얼마나 발전된 항구도시인가

를 말하고 있다.

kings 2

열왕기하 3 장

유다왕 여호사밧 왕 18 년째 해 아합의 아들 ( 아하시야의 형제 ) 여호람이 이스라엘서 12 년동안 왕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과 같지 않고 바알의 주상을 없이 하지 않았으나 여로보암의 죄를 범하고 떠나지 않는다.
한편,
왕하 1:1 절에서 말씀하듯이 모압은 아합이 죽고 배반을 했다고 했다. 그 부분의 대한 이어진 기록이다.
모압왕 메사..
그는 이스라엘을 배반한다. 이에 북이스라엘 여호람왕은 사마리아의 이스라엘 민족을 둘러보고, 유다의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어 모압을 치자고 한다.
여호사밧왕은 이에 승낙하고, 연합작전을 펼친다. 이에 여호람왕은 어느 길로 가야 할까하고 여호사밧왕에게 물으니 에돔 광야길로 가야한다고 한다.
모압으로 가는 길은 북쪽 요단을 걸쳐 길르앗 쪽으로 가는 길,
남쪽 브엘세바로 인하여 에돔을 걸쳐 가는 길에서 에돔을 걸쳐 가는 길로 결정한 것이다. 그 이유는 남쪽은 계곡과 산이 높고 많아 아마 모압왕 메사는 그 쪽에 대해 방비를 소홀히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쪽으로 선택한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 + 유다의 여호사밧 + 에돔 왕 연합작전 , 에돔이 이스라엘 국가에 합류- 지배국가 였기에.. (왕상22:47)
하지만 그들이 간지 7일 만에 가축을 먹일 물이 떨어진다. 여호람은 하나님께 통곡을 한다. 사지로 몰으셨구나~~
이에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는 질문에 여호람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대답한다.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 곁에서 시종들던 ) 엘리사가 있어요~~!
이에 3명의 왕이 엘리사에게 내려간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보고 하는 말~~ ‘ 뭐하러 오셨수~ 당신 부모들의 선지자들에게 묻지
이에 여호람은 그렇지 않다. 우리 3 왕을 여호와께서 모압에 넘기려 한다
이에 엘리사 유다 여호사밧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면 당신에게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
이에 거문고 탈 자를 불러 달라 하고 거문고 탈자가 온다.
그리고 개천을 많이 파라 ( 삽질을 많이 해라 ) 바람도 비가 없을 지라도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할 것이다.
아침이 되니 에돔쪽에서 흘러 땅에 물이 가득하였다.
이에 모압은 모든 왕들이 자신들을 치려 온다는 소문을 듣고 경계를 삼엄하게 한다.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일출이 물에 비치는 것을 보고 피가 섞인 물로 오해하여 상대 진영에서 자중지란 ( 자신
들끼리 싸우고 있구나 )으로 공격하러 간다.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공격해 오는 모압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치니 모압의 길하레세의 밭, 나무, 돌들을 친다
모압왕을 전세가 불리함을 보고, 에돔왕에게 가려했으나 이미 적이 되었고,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서 모압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다.~~~이스라엘에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각기 고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