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가 조상… 이스라엘과 혈연
야곱의 형제 ( 이스라엘의 형제 )
성서의 에돔 땅은 사해 남쪽 지역으로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국가의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압과는 세렛 시내를 경계로 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경계는 홍해에 맞닿아 있는 에시온게벨(현재 에일랏)까지였다. 에돔의 수도는 보스라로(사 34:1, 렘 48:24) 이곳에는 에돔의 궁궐이 있었다(암 1:12). 히브리어로 에돔의 의미는 ‘붉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와디 알-아르바 동쪽의 세일산의 색깔이 붉은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성서에 의하면 에돔 땅의 조상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로 그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붉었다(창 25:25).
또한 그는 야곱이 내어 준 붉은 것을 먹어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다(창 25:30). 결국 그가 살았던 지역은 에돔이라 불렸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세일 산 에돔 들에 거주했다(창 32:3; 36:8∼9). 창세기 36장은 세일 산에서 살았던 에돔 족속의 족보를 상당히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창 36:9∼43). 이는 아마도 에서가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관계는 에돔 족속이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에 조금 더 우호적이도록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데스에서부터 에돔 땅을 건너가고자 할 때 에돔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민 20:14∼21). 그러나 에돔은 모압과 암몬이 그랬던 것처럼 연맹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하지는 않았다. 성서는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의 형제이기에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신 23:7).
사막 유목민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하던 시대에 에돔은 이미 왕정을 이루고 있었다(민 20:14). 그러나 역사고고학적으로 볼 때 당시 에돔은 국가 개념의 왕정이 아닌 유목민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대보다 100년 정도 빠른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256번에 기록된 우루-두-무(URUU-du-mu·두무 도시라는 뜻)가 에돔 도시국가를 말한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었던 우두무라 불리던 유적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시대와 동시대에 기록된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주전 1213∼1203년에 재위한 메르넵타 왕 시대에 기록됨)는 ‘에돔으로부터 온 샤수 유목민’을 언급하고 있다. 샤수는 주전 15세기께부터 이집트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 ‘발로 걸어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샤수를 사막 유목민으로 보고 있다. 샤수는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사해 남쪽 지역을 넘어 시나이 반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들로 당시 국가보다는 족속(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왕보다는 족장의 개념이 더 어울린다. 때로 이들은 이집트의 북서쪽 지역을 넘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아멘호테프Ⅲ세 같은 경우 그의 적들의 목록에 샤수를 넣기도 했고 세티I세와 람세스Ⅱ세의 벽부조에는 샤수와의 전투 현장 모습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했던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 외에 샤수를 에돔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에돔 땅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고고학적 흔적이 주전 9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에돔을 사막 유목민의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다
사울은 왕이 되자 우선 그의 주변에 있던 이스라엘의 적을 정복해야만 했다. 이 중에는 에돔도 포함되었고 성서에 의하면 에돔을 비롯한 모든 적은 사울에게 정복되었다. 사울은 에돔 사람들을 관직에 앉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목자장 도엑은 에돔 사람이었다(삼상 21:7). 도엑은 놉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을 왕에게 고했던 인물이다. 사울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다윗시대에도 여전히 적군이었다. 다윗은 소금 골짜기 즉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만8000명을 물리쳤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어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게 하였다(삼하 8:13∼14). 심지어 그는 요압을 시켜 6개월 동안 남아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이도록 하였다(왕상 11:15∼16). 덕분에 솔로몬은 평화롭게 얻은 에돔 땅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어(왕상 9:26) 오빌에서 금을 가져올 수 있었고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비록 요압의 칼에서 살아남아 이집트에서 돌아온 하닷에 의해 에돔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잠시 벗어난 듯하나(왕상 11:14∼25) 여호사밧 때에 에돔에는 왕 대신 섭정 왕이 있었고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고자했던 모습은 에돔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리광산-키르벳 엔-나하스
이렇듯 성서는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기 즉 주전 11세기 후반부터 에돔과의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에돔이 주전 8∼6세기께 존재했던 나라였고 이스라엘의 속국이기보다는 독립국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시행된 캘리포니아 대학과 요르단 유물청의 키르벳 엔-나하스에서의 발굴은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키르벳 엔-나하스는 사해 남쪽에 위치한 유적지로 공중에서 찍은 사진에도 확연히 보이는 것처럼 사각형 모양의 요새화된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대부분이 주전 10∼9세기께 유물로 측정되고 있으며 주전 11세기께 이집트 인장들도 발견된 바 있다. 유적지 공중사진에서도 검은 흔적들이 목격되는데 이는 구리를 녹일 때 생기는 물질들이 굳어서 발견되는 구리 용재(鎔滓)의 흔적들로 이곳이 구리 광산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이스라엘의 주전 10∼9세기 유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벳 엔-나하스는 솔로몬의 이스라엘 경계에 세운 요새들 선상에는 속해 있지 않은 즉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유적지가 아니다.
결국 유적지를 발굴한 토머스 레비(Thomas Levy) 교수는 이 유적지는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에돔을 정복하고 세운 구리 광산을 위 한 요새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이곳을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네게브지역에 있는 팀나 유적지를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사실 이 유적지는 이집트의 구리 광산으로 주전 1400∼1250년께 활발한 활동이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오히려 미미한 흔적이 있을 뿐이며 구리광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요새화되어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성서에는 솔로몬이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요새화했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역대상 22장 3절에 예루살렘의 다윗성을 짓기 위해 철과 놋이 준비되었던 것을 보아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5만∼6만t의 구리 보유량을 가진 1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이 발견된 키르벳 엔-나하스가 아마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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